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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죽음의 땅’, 미야자키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 까리따스!

종교 그림

1937년 수도회가 설립되기 10년 전인 1920년대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공황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때 일본은 이를 타개하고자 국제연맹 탈퇴 후 제2차 세계대전을 계획했고, 이로 말미암아 일본 국민들은 더욱 심각한 경제위기와 사회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 열도가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을 때, 특히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지역으로 꼽히는 미야자키에서 활동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은 더 많은 선교사를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당시 ‘만민선교’에 힘을 모았던 교황 비오 11세는 특히 아시아 선교를 적극 권장했고, 그 지역 선교사들에게 방임 사제와 수도회 양성을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교황 비오 11세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미야자키 선교사 파견 요청을 수락하고 일본과 중국에 선교사 파견을 결심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유일한 수단은 애덕, 곧 ‘까리따스’입니다.”
(살레시오회 필립보 리날디 총장)

마침 그때는 살레시오회가 돈보스코 성인이 최초로 남미에 선교사를 파견한 후 50주년을 맞는 해였는데, 교황 비오 11세는 살레시오회에 일본과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놀라운 섭리로 마침내 살레시오회 9명의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고, 이때 살레시오회 리날디 총장은 파견되는 회원들에게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애덕, 곧 사랑”이라고 강조하였다. 일본으로 향하는 선교사 9명 가운데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설립에 큰 역할을 한 빈첸시오 치마티 사제와 안토니오 가볼리 사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두 사제에게 총장의 권고 말씀은 수도회 명칭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평생 선교활동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두 사제는 미야자키에 파견되어 미야자키 본당 주임신부와 보좌신부로 활동했다. 미야자키는 당시 일본에서도 가장 참담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화장터가 있고, 불법 양조장이 있었으며, 어린 소녀들의 성매매가 성행했다. 또한 범죄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그곳에 모여 살았다. 예수 성심의 선교열로 가득 찬 두 사제는 이처럼 ‘죽음의 땅’이라고도 불리던 미야자키 지역의 참상 앞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래서 두 사제는 마침내 정신적·육체적으로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 특히 당시 가난과 굶주림으로 길에 버려져 있던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구호활동을 펼치기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 모든 가난한 이를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 도움이 될 만한 애덕활동을 찾아 나섰다.

‘22전에 담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

22전

1929년 6월 치마티 신부는 살레시오회 총회와 돈 보스코의 시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가볼리 보좌신부를 미야자키 본당의 주임신부로 임명하였다. 1929년 9월, 3년 반의 보좌신부 기간을 거쳐 미야자키 본당의 주임신부가 된 가볼리 신부는 치마티 신부가 주임신부일 때 만들어진 ‘원죄없으신 성모회’라는 젊은 여성들의 모임에서 “가난한 이들과 병자를 찾아서 방문하는 것이 어떨까요?” 하고 호소하였다. 주임신부의 호소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젊은 여성들은 이 일을 시작하고자 경찰서와 시청에 상담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먼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방문이 끝나면 성당에 모여 그날그날 활동 내용을 보고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현세의 처참하고 각박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신앙의 말만으로는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시적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지금 당장 겪고 있는 물질적 문제의 해결이었다. 가볼리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방, 배를 채울 음식 등 육체적 고통을 먼저 해결해야 하느님의 실존을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가볼리 신부는 성모회 모임이 끝난 후 말하였다. “오늘, 아니 지금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굉장한 일을 시작하려고 생각하는데, 그 일을 위하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1전씩 성금을 내주시기 부탁합니다.” 그리하여 22전이 가볼리 신부의 손에 쥐어졌다.
22전을 손에 들고 가볼리 신부는 열렬한 심정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과 행위로 그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시작이었다.
성모회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 갈 때 말씀과 함께 나누어줄 물건을 가지고 갔는데, 주님의 섭리로 항상 그들의 손에 무언가 마련되었다. 장소나 시간에 상관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무언가 나누는 애덕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기적과 같은 도움을 보내주셨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도움을 받고 있던 가난한 노인들이나 병자들이 “나에게 이런 선물을 보내주시는 하느님이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천국에서의 하루가 이런 날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물질적 도움을 받은 이들은 정신적으로도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갔다. 성모회원들과 선교사들의 활동에 미야자키 시민들은 “가톨릭은 사욕도 야심도 없고, 오직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랑을 가진 종교”라고 생각하며 협력하였다.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은 또 다른 자선사업을 모색하였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중 몇 명이라도 안정된 시설에 수용하여 좀 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수용시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치마티 신부의 허락을 받은 가볼리 신부는 낡은 집을 구입하여 8-9명을 받아들였다. 수용시설 및 체계적인 운영 계획이 신자는 물론 비신자들에게도 알려져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훗날 본회 사도직의 근간이 되는 ‘구호원’을 설립하게 되었다(1929년).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사랑의 씨앗

하지만 세계 경제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당시 일본은 더욱 악화되어 이 보호시설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두 사제와 함께 실제적이고 체계적으로 구호원 일을 도와줄 봉사자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여성 평신도 봉사 단체인 ‘사랑의 딸들(Figlie della Carità, 愛子會)’이었다(1933년).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인이나 장애인들을 돌보고, 세탁장에서 손에 피가 나도록 빨래를 문지르는 일, 유아원의 어린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고 돌보는 일, 주방 일, 온갖 야채를 재배하는 농사, 소와 닭 기르기 등 젊은 여성으로서 많은 인내와 희생이 요구되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가볼리 신부는 젊은 여성들이 정신적 양식도 없이 일만 한다면 생활에 피로가 겹칠 뿐이라고 생각하여 지침을 만들고, 하루 일과 중 묵상, 영적독서, 묵주기도, 미사와 저녁기도 등을 함께하며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외국인 선교사들은 모든 활동을 감시받았다. 신자들과 접촉한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를 주었다. 첫 번째 마찰은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활동하는 가고시마에서 발생하였는데, 온갖 종류의 비난들이 유포되었고,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많은 공동체가 있던 섬들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가고시마 지목구는 미야자키에 인접해 있었다.
치마티 신부가 미야자키의 지목구장으로 지명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목구장으로 지명된 후 이탈리아에서 그의 옛 제자들이 몬시뇰의 제의들을 보내왔다. 그는 만약 그것들을 팔 수 있다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과 함께 돌려보냈다.
이렇게 매우 불안정한 경제, 사회적 상황에서 1936년 치마티 신부는 가볼리 신부에게 구호원 사업의 존속을 위해 수녀회 설립이라는 의향을 제시하고, 이 임무를 맡아줄 것을 권유하였다.
수녀회 설립의 임무를 권고 받았을 때 가볼리 신부는 매우 놀랐고, 도저히 그런 일을 해낼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볼리 신부는 치마티 신부의 말처럼 일본 군국주의가 계속된다면 확고한 기반이 없는 이 모임이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권고를 거절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치마티 신부가 다시 수도회 설립을 권유하자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치마티 신부가 세 번째로 권유하였을 때, 가볼리 신부는 깊은 기도와 숙고 후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랑의 딸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의 탄생

가볼리 신부는 구호원에서 일하던 ‘사랑의 딸들[愛子會]’에게 일본의 사회 정세가 불안정한 시기에 구호원을 계속 유지해 나가려면 수도회 형태가 필요하다며 수도회 입회를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사랑의 딸들은 가볼리 신부를 통해 성심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였고, 애덕에 헌신하길 원했던 평범한 여성들의 그 거룩한 응답은 마침내 ‘죽음의 땅’ 미야자키에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이 탄생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치마티 사제와 가볼리 사제는 시대적 필요와 선교지에 방인 수도회 설립을 권고한 교황 비오 11세의 뜻에서 영감을 얻어, 1937년 ‘사랑의 딸들(Figlie della Carità, 愛子會)’을 기반으로 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애자회

 

가경자 빈첸시오 치마티 사제와 안토니오 가볼리 사제 그리고 ‘사랑의 딸들(Figlie della Carità, 愛子會)’의 아름다운 동행

치마티 사제와 가볼리 사제는 성격이나 성향이 달랐지만 가난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갈망을 공통으로 지녔다. 치마티 사제는 “저를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곳으로 보내주십시오”라고 총장 신부에게 청하였고, 가볼리 사제는 남미나 중국 선교를 희망하였으나 현재 로마에도 사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당하다가, 마침내 “아무 곳이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파견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여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일본 땅에 파견된 해, 치마티 사제의 나이는 46세였고, 가볼리 사제의 나이는 37세였다. 그 당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영혼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요인은, 성격도 성향도 나이 차이도 큰 두 사제의 하느님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지닌 아름다운 동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26년 미야자키는 일본에서도 ‘죽음의 땅’이라고 불릴 만큼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곳이었다. 이곳에 파견된 두 사제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가난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연민이 북받쳐 올랐다. 그리하여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그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 본당의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원죄 없으신 성모회’가 가난한 이들을 방문해 기도하며 활동하고 있었는데, 훗날 치마티 사제가 지목구장으로 선임되어 이동하고 가볼리 사제가 주임신부가 된 후 ‘원죄 없으신 성모회’에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굶주린 이들과 병자들에 대한 우선적 방문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특히 길에서 노숙하며 죽어가는 노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구호원’을 개설하게 되었다.
가난한 이들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 안에서 ‘구호원’은 점점 노인들과 병자들, 어린이들까지 보호하게 되었고, 무상으로 그들을 돌보아 주던 ‘빈첸시오’ 회원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가볼리 신부님은 회원들에게 체계적으로 양성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봉사활동을 위한 양성을 받고 일정한 규칙 안에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젊은 여성들의 단체인 ‘사랑의 딸들(Figlie della Carità, 愛子會)’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전쟁에 휩싸인 일본 정세는 더욱 악화되고 지원금마저 끊길 위기에 놓이게 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 앞에서 두 외국인 선교사의 입지조차 불안정한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치마티 사제는 당시 교황 비오 11세의 방임수도회 설립 권고를 기반으로 하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구호활동이 이어질 수 있도록 여자 수도회 설립에 대한 영감을 받고 가볼리 사제에게 이를 권고하였다. 가볼리 사제는 치마치 사제의 세 번째 권고에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순명함으로써 두 사제에 의해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설립이 실현되게 되었다.
또한 미야자키 본당의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빈첸시오’ 회원들은 치마티 사제에 이어 가볼리 사제의 권고에 따라 ‘구호원’에서 무상으로 헌신했고, ‘사랑의 딸들(Figlie della Carità, 愛子會)’을 거쳐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에 입회하여 설립의 기초를 다졌다.
그들이 활동하던 당시 전쟁의 위협과 가난이라는 너무나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람들, 곧 가장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죽음에 이르는 투신(당시 ‘사랑의 딸들’ 회원으로 활동하며 수련 중에 굶주림과 과로로 병사한 이들이 있다.)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러한 기도와 희생을 통해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수도회 안에 꽃피울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