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성심

영성1

우리 정신의 중심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주고 용서하는 자비로운 사랑으로서,
그 원천이요 모범은 예수님의 성심,
즉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와 물을 쏟으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우리는 이 자비로운 사랑을
묵상과 기도, 공동생활과 사도적 활동 안에서 체험하고 기르며,
함께 일하는 사람,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장 작은이들에게" 증거하며 열성적으로 선포한다."
(회원 10조에서)

 

예수 성심 신심은 성경 안에 묘사된, 곧 창에 찔려 뚫린 심장이라는 구체적 사건의 신비에서 기인한다. 예수님의 뚫린 심장의 신비에서 피와 물이 나온다는, 이 눈에 보이는 표징은 예수 성심 신심의 성경적 근거이고 원천이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요한 19,31-37)



요한복음은 무엇보다 먼저 다른 이로부터 들은 것이 아닌, 복음사가 자신이 체험한 어떤 선포를 한다고 전하면서, 그 스스로 본 것을 선포하고 그에 대해 증언한다고 언급한다. 요한복음 19장 35절의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내재하는 큰 신비를 이해하고, 꿰뚫어보았다는 의미이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그 신비를 믿도록 요청한다.
옆구리를 찔리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그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고 그의 사랑은 정점에 다다랐다. 그러나 죽음 이후 창에 뚫린 옆구리는 인류를 향해 열린 그리스도의 심장의 표징이 된다. 창이 옆구리를 찔렀고 몸속 깊이 들어가 그분의 심장을 열었다는 것의 영적, 상징적 의미가 중요하다. 희생제사적 의미를 지닌 피와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의 성심으로부터 솟아나는 물로써 예수님이 새로운 계약의 희생제사를 완성하셨음을 주목하게 한다. 죄가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결과인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찔린 심장에서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고, 그분의 교회 안에서 표현하고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초기교회 교부시대 이후부터,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옆구리 찔린 상처가 초자연적 은총의 원천임을 깨달았다. 신비가들에서 시작하여 이 신심은 중세기 수도원을 중심으로 꽃피웠다. 그러나 당시 이 신심은 사적이고 개인적이었다. 또한 단지 지성적인 신학자들과 영적인 엘리트들에게만 제공되었다. 예수성심 신심은 장엄한 전례적 예식을 통해 공적 신심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영성의 충실한 딸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와 성 요한 에우데스는 그러한 시대의 필요성에 답을 주는 데 공헌했다. 그리고 그들 이전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그에 대한 영적 배경을 준비했으며, 이러한 배경 안에서 예수 성심은 장엄하게 당신 자신을 직접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계시하셨고, 이후 이 직접 계시를 통해 예수 성심 신심은 전 교회에 전파되었다.
교회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전해 받은 계시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에 대해 주의 깊게 연구하고 교황들의 회칙을 반포하는 등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들이 생겨났다. 예수회원들의 노력과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들을 통해 이 예수 성심 신심은 교회 안에서 가장 꽃피우는 신심이 되었으며, 살레시오 초창기 회원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살레시오 회원들 사이에서도 예수 성심 신심은 매우 강하여, 아르날도 페드리니가 그의 책 『돈 보스코와 성심 신심』에서 주목한 것처럼, 이미 1930년대에 살레시오 회원들이 세운 예수 성심께 봉헌한 성당은 40여 개가 되었다. 게다가 예수 성심을 중심 영성으로 삼는 수도회들이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37년 일본의 미야자키에서 두 명의 살레시오 선교사, 가경자 몬시뇰 빈첸시오 치마티와 돈 안토니오 가볼리에 의해 설립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이다. 즉, 살레시오회에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예수 성심께 드리는 기념비이며 예수 성심 신심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을 실행하고자, 사도적이고 자매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며 순종하시고 가난하시고 정결하신 주님의 제자들로서 주님과 나누는 기도의 대화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 자신을 바치는 관대한 봉헌으로 활성화되고 살레시오 정신에서 활력을 얻는 성심의 사랑의 사도들이다.
우리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하고 사명 수행에서 우리를 받쳐 주고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도록 우리에게 수호자요 보호자로 주어진 성인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공경한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교회가 장엄하게 예수 성심께 맡겨지고 이 성심에 대한 신심이 번성하여 널리 확산되던 역사적 시기에 태어났다. 살레시오 선교사들에게서 배웠으며 초창기부터 우리는 이 신심을 기쁘게 가꾸어 왔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예수 성심을 ‘최고의 주보’로 인정하며, 오늘날 이 신심의 견고한 복음적 뿌리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지니고 이 신심을 촉진하고자 한다.

자비로운 사랑의 원천이요 모범인 예수 성심

우리 정신의 중심은 자비로운 사랑이며, 예수 성심이 우리의 모범이요 원천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행하는 우리의 복음적 봉사를 위한 빛과 힘을 예수 성심의 자비로운 사랑에서 길어 내며, 모범이신 예수님을 관상하고 닮도록 노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사도’로서 교회 안에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계속 파견하시는데,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을 ‘성심의 사도’로서 부르시고 파견하신다.

자비로운 예수 성심의 또 다른 이름, ‘까리따스(사랑)’

‘까리따스’는 하느님의 이름이며, 수녀들의 이름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은 학문의 결과물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관상하면서, 또 그분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면서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이름 또한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알려지고 체험되어야 한다.

자신을 내주고 용서하는 예수 성심의 자비로운 사랑

성 필립보 네리의 보편적이고 기쁨에 찬 활동적인 사랑,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삶과 활동의 황홀경’인 실제적인 사랑, 성 빈첸시오 드 폴의 부드럽고 자비로운 사랑, 돈 보스코의 사목적이고 젊고 서민적인 사랑에서 이어져 온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의 삶과 활동 전체를 특징지어 주는 사랑은 자신을 내주고 용서하는 예수 성심의 자비로운 사랑이다.
자비로운 사랑은 우리에게 활력을 주어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사심 없이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내주게 한다. 그리고 자비로운 사랑은 우리의 소명이라는 하느님의 선물에 응답하는 데 가장 적절한 그리스도교적 태도이다.

성체성사로, 그리고 이웃 안에서 알아보고 섬김으로 표현되는 예수 성심

돈 보스코는 성체의 예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특전적 관계로 여겼다. 성체의 예수님을 ‘부활하신 분’ ‘살아 계신 분’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거룩한 미사와 성체에 대한 신심을 살았고 이를 장려하였다. 이러한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 신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며,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 안에 그대로 전해지고 꽃피워지게 되었다.
또한 예수 성심의 사랑으로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온전한 희생과 사랑을 봉헌했던 초창기 수녀들처럼, 우리의 존재 전부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곧 ‘믿음과 헌신으로 행해지는 일상의 모든 의무’를 바쳐 우리의 삶 전체가 영적 예배로 변화되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성체 성사이며 ‘활동 안에서의 관상’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신비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