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태 5,7
설립자
안토니오 가볼리 사제
(1888-1972)
(1888-1972)
안토니오 가볼리 사제(Don Antonio Cavoli, SDB)
- 1888년 8월 4일 이탈리아 산 죠반니 인 마리냐노 출생
- 1914년 5월 1일 사제 수품(군종사제로 활동)
- 1920년 10월 7일 살레시오 수도회 입회
- 1926년 2월 8일 선교사로 일본 도착(당시 37세)
- 1937년 8월 15일 치마티 신부와 함께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설립
- 1972년 11월 22일 선종(84세)
1888년 이탈리아 로마냐 지방에서 출생한 안토니오 가볼리 사제는 엄격한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따뜻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에게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고 성장했는데, 9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릴 때부터 사제의 꿈을 안고 성장해 온 신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해 1월, 교구사제로 수품을 받고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
가볼리 사제 특유의 열정으로 활발히 본당 사목을 했지만 늘 마음 한켠에는 교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영혼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는데, 그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탈리아에 전쟁이 일어났고 곳곳에서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사제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다.
사제로서 당시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하게 된 신부는 그해 7월 군종사제로 지원하였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하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 체험을 깊이 하게 되었다.
특히 침대 옆 벽에서 흙이 떨어져 다른 때보다 2시간 일찍 기상하여 작업 중인 군인들에게 가 있는 동안 적군의 폭격으로 침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사건을 겪으면서, 평소 도움을 청하며 기도드린 성모님께서 돌보아 주셨다고 고백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군종사제로서 가장 주력했던 것은 군인들과의 대화였다. 오랜 전쟁으로 이탈리아 군인의 사기가 점점 꺾여가면서 젊은이들은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 점점 영혼이 피폐해졌다. 마침내 어떤 병사가 행진 중에 총기를 내던지고 이탈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때 가볼리 신부는 군종사제로서 그 청년과 함께하면서 그 청년이 사형을 받아야 하는 현실과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겪었고 영혼의 깊은 ‘어둔 밤’을 체험하게 되었다.
퇴역한 후 주어진 피정 기간 동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영혼에 대한 선교열에 불타오름을 느끼게 되었고, 그에 응답하고자 교구사제를 나와 다시 선교수도회 사제의 길을 택하여,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1926년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된 가볼리 사제는 그곳의 참상을 보고 연민에 북받쳐 구호활동을 벌이던 중,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 지속적으로 구호활동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수도회 설립의 영감을 받은 치마티 신부에게 세 차례 권고를 받고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응답하여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가볼리 사제는 구호원에서 활동하던 ‘사랑의 딸들(Figlie della Carità, 愛子會)’에게 치마티 사제의 말씀처럼 불안정한 사회정세에 구호원을 계속 유지해 나가려면 수도회 형태가 필요하다고 설득하였다. 그러고 나서 구호원 사업에 지장이 없을 만큼 몇 사람씩 선발하여 수도자 양성을 시작하였다. 그 후 재정을 마련하고자 이탈리아로 몇 차례 모금 여행을 다녀오고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외부로부터 원조가 완전히 끊겼을 때에도 ‘사랑의 딸들’ 회원들과 가볼리 신부는 구호원의 생계유지를 위해 황무지 개간, 대나무 공장 운영, 소 사육 등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을 하였다.
안타깝게도 6명의 젊은 수녀들이 굶주림 속에 혹독한 노동으로 건강이 나빠져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또한 군국주의가 극에 달하자 치마티 신부와 가볼리 신부는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강제 수용되었고, 일본 패망을 앞두고 풀려나 전쟁의 폭격을 맞은 구호원을 다시 재건하였다.
구호원은 전쟁으로 버림받은 아이들과 노인들로 넘쳐났으며, 가볼리 사제는 치마티 사제와 초창기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 성심의 사랑을 살기 위해 거침없이 일하고 자신의 모든 것, 그야말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참된 ‘까리따스’를 증거하였다.
가볼리 사제의 일생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버림 받은 사람들을 위한 부성적이며 행동적인 사랑의 봉사를 특징으로 하며, 신부의 카리스마는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버림 받은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정신이라고 함축하여 표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