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태 5,7
예수성심
예수 성심 신심은 성경 안에 묘사된, 곧 창에 찔려 뚫린 심장이라는 구체적 사건의 신비에서 기인한다. 예수님의 뚫린 심장의 신비에서 피와 물이 나온다는, 이 눈에 보이는 표징은 예수 성심 신심의 성경적 근거이고 원천이다.
요한복음은 무엇보다 먼저 다른 이로부터 들은 것이 아닌, 복음사가 자신이 체험한 어떤 선포를 한다고 전하면서, 그 스스로 본 것을 선포하고 그에 대해 증언한다고 언급한다. 요한복음 19장 35절의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내재하는 큰 신비를 이해하고, 꿰뚫어보았다는 의미이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그 신비를 믿도록 요청한다.
옆구리를 찔리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그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고 그의 사랑은 정점에 다다랐다. 그러나 죽음 이후 창에 뚫린 옆구리는 인류를 향해 열린 그리스도의 심장의 표징이 된다. 창이 옆구리를 찔렀고 몸속 깊이 들어가 그분의 심장을 열었다는 것의 영적, 상징적 의미가 중요하다. 희생제사적 의미를 지닌 피와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의 성심으로부터 솟아나는 물로써 예수님이 새로운 계약의 희생제사를 완성하셨음을 주목하게 한다. 죄가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결과인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찔린 심장에서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고, 그분의 교회 안에서 표현하고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초기교회 교부시대 이후부터,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옆구리 찔린 상처가 초자연적 은총의 원천임을 깨달았다. 신비가들에서 시작하여 이 신심은 중세기 수도원을 중심으로 꽃피웠다. 그러나 당시 이 신심은 사적이고 개인적이었다. 또한 단지 지성적인 신학자들과 영적인 엘리트들에게만 제공되었다. 예수성심 신심은 장엄한 전례적 예식을 통해 공적 신심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영성의 충실한 딸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와 성 요한 에우데스는 그러한 시대의 필요성에 답을 주는 데 공헌했다. 그리고 그들 이전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그에 대한 영적 배경을 준비했으며, 이러한 배경 안에서 예수 성심은 장엄하게 당신 자신을 직접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계시하셨고, 이후 이 직접 계시를 통해 예수 성심 신심은 전 교회에 전파되었다.
교회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전해 받은 계시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에 대해 주의 깊게 연구하고 교황들의 회칙을 반포하는 등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들이 생겨났다. 예수회원들의 노력과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들을 통해 이 예수 성심 신심은 교회 안에서 가장 꽃피우는 신심이 되었으며, 살레시오 초창기 회원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살레시오 회원들 사이에서도 예수 성심 신심은 매우 강하여, 아르날도 페드리니가 그의 책 『돈 보스코와 성심 신심』에서 주목한 것처럼, 이미 1930년대에 살레시오 회원들이 세운 예수 성심께 봉헌한 성당은 40여 개가 되었다. 게다가 예수 성심을 중심 영성으로 삼는 수도회들이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37년 일본의 미야자키에서 두 명의 살레시오 선교사, 가경자 몬시뇰 빈첸시오 치마티와 돈 안토니오 가볼리에 의해 설립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이다. 즉, 살레시오회에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예수 성심께 드리는 기념비이며 예수 성심 신심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을 실행하고자, 사도적이고 자매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며 순종하시고 가난하시고 정결하신 주님의 제자들로서 주님과 나누는 기도의 대화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 자신을 바치는 관대한 봉헌으로 활성화되고 살레시오 정신에서 활력을 얻는 성심의 사랑의 사도들이다.
우리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하고 사명 수행에서 우리를 받쳐 주고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도록 우리에게 수호자요 보호자로 주어진 성인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공경한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교회가 장엄하게 예수 성심께 맡겨지고 이 성심에 대한 신심이 번성하여 널리 확산되던 역사적 시기에 태어났다. 살레시오 선교사들에게서 배웠으며 초창기부터 우리는 이 신심을 기쁘게 가꾸어 왔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예수 성심을 ‘최고의 주보’로 인정하며, 오늘날 이 신심의 견고한 복음적 뿌리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지니고 이 신심을 촉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