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7
마태 5,7
역사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선교 초기(1956-1965년)
전쟁의 흔적들이 서서히 복구되고 수도회가 점차 안정을 찾아갈 무렵, 일찍부터 해외 선교의 열망을 품고 있었던 가볼리 사제는 이미 한국에 진출해 있던 살레시오 수도회 회원들로부터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 상황을 전해 듣게 된다. 수도회 내에 이미 서원한 10여 명의 한국인 수녀가 있었으므로 한국 선교가 어렵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가볼리 사제는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 주교의 초청으로 1956년 10월 19일 광주교구(현 광주대교구) 남동 성당에 세 명의 선교 수녀를 파견하였다. 이는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첫 해외 선교사 파견이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공업 중심의 과도한 경제개발 정책으로 인해 도시와 농촌 모두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사회 변화와 지역 교회의 필요에 따라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본당 사도직 외에도 소록도 파견과 직업 교육 및 도시빈민을 위한 국수 공장 운영 등에 파견하고 참여함으로써 사회 복음화를 위한 카리스마 실현에 헌신하였다.- 수도회 설립
- 1926년 살레시오 수도회 선교사 일본 파견
- 1929년 구호원 설립
- 1932년 ‘사랑의 딸들(Figlie della Carità, 愛子會)’ 발족
- 사랑의 딸들[愛子會] 회원 중심으로 ‘미야자키 까리따스 수녀회’ 설립
- 한국 진출
- 1956년 수도회 한국 진출(광주대교구 남동 성당 파견을 시작으로 한국 선교 시작)
- 1960-1970년대 소록도 미감아 보호소/ 무료급식소 조달 위한 국수 공장 운영
한국관구의 성장(1966-1985년)
한국 선교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면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지부는 관구로 승격되었다(1968년). 이로써 한국관구는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첫 해외관구가 되었다. 1980년대 한국교회는 천주교 전례 200주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과 순교자 103위 시성식 등의 굵직한 행사들을 치르면서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했는데, 이 시기에 한국관구도 입회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광주시 학동에 있던 수녀회 본원을 지금의 임암동으로 이전하였다(1985년). 본원, 지원원, 교육관, 양로원, 유치원, 어린이집까지 차례로 갖추게 된 새 관구관은 회원 양성과 다양한 사도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적절한 선교 전초기지의 역할을 해 주었다. 이 무렵 국내 사도직 활동은 본당과 사회복지 사도직 외에도 교육, 의료 및 출판 사도직에 걸쳐 더욱 전문화되었고, 그 영역은 광주대교구에 이어 전주, 춘천, 서울, 제주, 수원, 부산, 원주 교구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특히 1983년 가톨릭 신앙 월간지 『생활성서』 창간은 사회홍보수단을 통한 선교의 장이라는 점에서 본회 설립 카리스마의 소중한 재현이라 할 수 있다.- 도약기(1970-1980년대)
- 1968년 한국관구로 승격(본회 첫 해외 관구)
- 성장·발전기(1980-1990년대)
- 한국 정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등 신자수 급증, 사회복지시설 운영 급증, 사회 정의 실현 욕구 급증, 더불어 성소자 급증
- 광주 임암동에 관구관을 이전하고 양성원, 어린이집, 유치원, 양로원 등 갖춤
- 생활성서사를 통한 출판사도직 시작
한국 선교 30주년과 해외선교(1986-2008년)
한국관구는 1980-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특히 1986년은 한국 선교 30주년을 맞는 해이기에 그동안 걸어온 길을 설립자의 영성에 따라 되짚어 보는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이는 선교 수도회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관구가 처음 해외선교사를 파견한 파푸아뉴기니 선교는 바로 이러한 성찰에서 비롯된 용기 있는 선택이자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한국교회와 함께하려는 귀중한 결단이라 하겠다. 또한 수도회 설립 60주년을 맞아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1998년 1월 1일 교황청으로부터 성좌설립 수도회로 승인받았고, 2천 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관구는 사회와 수도회 내부에서 직면하게 되는 새로운 도전들 앞에서 공동체적 성찰과 적절한 진단을 통한 내적 쇄신을 이루고자 하였다.- 성장·발전기(1980-1990년대)
- 한국 진출 30주년 기념 사업(파푸아뉴기니 선교 시작)
- 보육시설 ‘경애원’ 개원(1987년)
- 잠실종합사회복지관(1990년), 까리따스 방배종합사회복지관(1998년) 등 복지관 운영
- 살레시오 가족 정식 가입
- 성 가롤로 의원 인수
- 서울 까리따스 교육관 개관
- 국내 사도직이 본당 외 교육, 출판, 의료 사도직에 걸쳐 더욱 전문화되고, 그 영역도 광주대교구에 이어 전주, 춘천, 서울, 제주, 수원, 부산, 원주교구로 뻗어나감
- 한국 선교 30주년과 해외 선교
- 1986년 한국 선교 30주년을 맞아 한국관구 첫 해외 선교지 파견(파푸아뉴기니)
- 영적 쇄신기(1990년대 말-2000년대)
- 한국 정세: IMF 외환위기, 환경에 대한 관심과 디지털 혁명에 따른 새로운 변화 직면
- 본회 영적 쇄신기
- 1998년, 성좌법 설립 수도회 승인
- 쇄신을 위한 공동체적 성찰과 진단
- 2001년 필리핀 선교 수녀 파견
- 2002년 중국 선교 수녀 파견
한국 내 세 관구 설립(2009년)
200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관구의 회원 수는 500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한국 선교 50여 년 만에 이룬 이 놀라운 성장이 매우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급변하는 현대 사회와 교회 안에서 여전히 세상의 표징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도생활의 쇄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수도회는 2006년에 세 개의 관구로 분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2009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한국관구는 광주관구, 서울관구, 수원관구 이렇게 세 관구로 분할 설립되었음이 교령으로 선포되었다. 이 무렵 제13차 총회에서는 수도회 명칭을 ‘미야자키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로 바꾸어 새로운 출발을 위한 ‘새 부대’를 마련하였다. 이제 한국의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세 관구는 언제나 예수님을 우리 수도회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본질로 삼아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한국관구의 세 관구 설립(광주, 서울, 수원)
- 수도생활 쇄신을 위해 2006년 세 관구 설립 결정
- 2009년 제13차 총회에서 쇄신의 의지를 담아 수도회 명칭 변경
- 2009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세 관구 설립
- 전 세계 16개국에 파견된 가운데 ‘자비의 예수성심 서울관구’의 사도직
-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들은 세계 16개국(한국, 일본, 이탈리아, 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아르헨티나,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중국, 베트남, 남수단, 우간다)에 파견되어 있습니다. 그중 서울관구는 설립 신부님들의 삶과 정신이 두드러진 까리따스 사도직과 해외 선교의 특성을 살려 나가면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삶의 중심에 두고자 ‘자비의 예수 성심’을 주보로 정했습니다.
- 서울관구는 서울대교구, 의정부교구, 춘천교구, 원주교구에서 활발하게 사도직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호주 교포사목 및 파푸아뉴기니와 필리핀에 해외 선교지를 두고 있으며, 사회복지와 유아교육 사도직, 본당 사도직, 여정성서 사도직, 해외선교 등을 수행하면서 언제나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 가까이에서 살아가고자 오늘도 이 시대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길을 나섭니다.